북악산 옛 모습으로 복원 이곳은 북한군의 공중위협으로부터 청와대를 방호하기 위해 1979. 10. 15일부터 북악통제대 및 발칸진지를 설치 운용한 자리이며 2000년 9월 9일 보다 효율적인 운용을 위해 다른 곳으로 이전하였다. 민족의 정기가 서려있는 이곳 북악산을 우리가 살고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영원한 삶터로 가꾸기 위해 옛 모습으로 복원하다. 민족과 함께 영원히 살아 숨쉬길 기원하며. 2001년 새해 아침 |
ㅇ 촬영일자 : 2010. 11. 14 외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정상
1․21 사태 소나무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부대의 김신조외 30명의 무장공비들이 청와대를 습격할 목적으로 침투하였을 때 우리 군경과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때 수령 200년이 된 이 소나무에는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다.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
ㅇ 촬영일자 : 2010. 11. 14
ㅇ 촬영일소 : 북악산 능선
서울 성곽 숙정문 지정번호 : 사적 제10호 / 시대 : 1396년(태조 5)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삼청동 산2-1번지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사대문 중에 북문에 해당한다. 서울 성곽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졌으며 처음 지을 때에는 숙청문이라고 하였다. 16세기 초반에 지금의 숙정문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도성은 대개 동서남북에 성문을 두는데 북문은 정궁 뒤에 놓이기 때문에 통행에 거의 이용되지 않는 상징적인 문이었다. 음양오행설에 따르면 북문은 물을 상징하는 음에 해당하기 때문에 가뭄이 있을 때에는 남대문을 닫고 북문을 열어 두었다. 아치 형태의 홍예문 위에 있는 목조 누각건물은 소실되었던 것을 고증을 거쳐 1976년에 복원한 것이다. |
ㅇ 촬영일자 : 2010. 11. 14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숙정문
삼청공원 말바위 유래 조선시대에 말을 이용한 문무백관이 시를 읊고 녹음을 만끽하며 가장 많이 쉬던 자리라 하여 말(馬)바위라 불리기도 하고, 백악(북악)의 산줄기에서 동쪽으로 좌청룡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끝에 있는 바위라 하여 말(未)바위라는 설도 있다.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말바위
서울성곽 사적 제10호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조선 왕조를 개국한 태조는 즉위한 지 한달도 못 되어 한양 천도 계획을 명하고, 태조 4년(1395) 경복궁, 종묘, 사직단의 건립이 완성되자 곧바로 정도전이 수립한 도성 축조 계획에 따라 서울성곽을 수축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성곽은 북악산(342m), 낙산(125m), 남산(262m), 인왕산(338m)을 잇는 총 길이 59,500자(약 18.2Km)의 성곽으로 평지는 토성, 산지는 산성으로 계획되었다. 이 방대하고 시급한 사업을 농한기에 완성하기 위하여 이듬해인 1396년 1, 2월의 49일 동안 전국에서 11만 8천명을 동원하여 성곽의 대부분을 완공하였고, 가을 농한기인 8, 9월의 49일 동안에 다시 79,400명을 동원하여 봄철에 못다 쌓은 동대문 구역을 완공하는 동시에 4대문과 4소문을 준공하였다. 그 후 27년이 지나 세종은 서울성곽을 전면 석성으로 수축하는 대대적인 보수 확장 사업을 벌였다. 세종 4년(1422) 1월 농한기에 전국에서 약 32만명의 인부와 2,200명의 기술자를 동원하여 완공하였다. 서울의 인구가 약 10만명인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규모의 공사였고 이 공사로 인해 발생한 사망자 수만 872명에 달했다. 이것이 지금 서울성곽의 골격이다. 이후 서울성곽을 재정비했던 숙종 30년(1704)까지 260년간 서울성곽은 부분적인 보수만 있었을 뿐 큰 붕괴는 없었다. 본래 서울성곽은 도성을 방어할 목적으로 쌓았지만 정작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서울성곽은 제구실을 하지 못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하였기 때문에 성곽 자체는 전란으로 인한 큰 피해는 없었다. 임진왜란의 경험을 토대로 인조는 서울성곽과는 별도로 전쟁에 대비하여 남한산성과 강도성(강화도 산성)을 수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결국 굴복하고 청나라와의 삼전도 맹약 중에는 조선은 앞으로 기존 성곽을 보수하거나 새로 성곽을 쌓지 않는다는 조항이 있어서 서울성곽은 방치된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다. 그후 약 70년이 지난 1704년, 숙종은 일부 신하들이 청나라와의 조약을 들어 반대하는 것을 물리치고 서울성곽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나아가 북한산성까지 쌓으며 도성의 방어체제를 정비하였다. 이것이 근대 사회로 들어오면서 의도적으로 헐어내기 이전의 서울성곽이다. 이후 1899년 서대문과 청량리 사이 전차를 부설하면서 동대문과 서대문 부근의 성곽 일부가 헐려 나갔고, 이듬해는 용산과 종로 사이 전차 부설을 위해 남대문 부근을 철거하게 되었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면서 서대문과 혜화문(동소문)이 헐리며 사실상 서울의 평지 성곽은 모두 철거되어 오늘날에는 총 길이 18.2Km중 산지 성곽 10.5Km만 남게 되었다. 2006년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는 서울을 유네스코 세계 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하여 서울성곽을 가능한 한 옛 모습으로 복원하는 계획을 수립하고 그 정비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말바위 전망대 부근
숙정문(肅靖門)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崇禮門 : 예를 숭상한다는 뜻)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태조 5년(1396) 처음 서울성곽을 쌓을 때는 지금 위치보다 약간 서쪽에 있었으나 연산군 10년(1504)에 성곽을 보수하면서 옮겨졌다고 한다. 숙정문은 본래 사람들의 출입을 위해 지은 것이 아니라 서울성곽 동서남북에 4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평소에는 굳게 닫아두어 숙정문을 통과하는 큰길은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는 숙정문을 열고 남대문을 닫아두었다고 하는데 이는 태종 16년(1416)에 기우절목(祈雨節目 : 기우제 시행규칙)을 만들면서 북쪽은 음(陰), 남쪽은 양(陽)이라는 음양의 원리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처럼 숙정문 지역은 풍수지리적으로 음기가 강한 곳이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학자인 홍석모의 동국세시기에는 “정월 대보름 전에 민가의 부녀자들이 세 번 숙정문에 가서 놀면 그 해의 재액(災厄)을 면할 수 있다”는 풍속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규경은 오주연문장전산고라는 저서에서 “숙정문을 열어 놓으면 장안 여자들이 음란해지므로 항시 문을 닫아두게 했다”는 정반대의 속설을 전하고 있다. 숙정문은 오랫동안 문루가 없이 월단(月團 : 무지개 모양의 석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 서울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한 것이다.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숙정문
1․21 사태 소나무 □ 1968년 1월 21일 북한 124군부대 김신조 등 31명은 청와대 습격을 목적으로 침투하여, 현 청운실버타운(청운동) 앞에서 경찰과 교전 후 북악산 및 인왕산 지역으로 도주하였다. 당시 우리 군경과 치열한 교전중 현 소나무에 15발의 총탄 자국이 남게 되었고, 이후 이 소나무를 1․21 사태 소나무라고 부르고 있다. □ 무장공비 일당은 당시 청와대 및 주변시설을 완벽하게 숙지하고 침투간 아군복장과 민간복 착용, 취객으로 위장하는 등 치밀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도발을 자행하였다. □ 1월 21일 교전 후 14일간 작전결과 침투한 31명 중 1명 도주, 29명 사살 1명 생포(김신조)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사건을 계기로 향토예비군이 창설(‘68.4.1)되었다.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능선
서울 성곽(城郭) 지정번호 : 사적 제10호 시대 : 조선 태조 5년(1396)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 일원 이 성곽은 조선을 세운 태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전쟁을 대비하고,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거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해 쌓은 시설이다.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2년 후인 1396년에 모두 20만 명을 동원하여 쌓았고, 그로부터 26년 후인 세종 4년(1422)에 모두 돌로 쌓는 한편, 활과 총을 쏠 수 있는 시설을 만들었으며, 그 후 몇 차례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 성곽은 높이가 12m, 둘레가 약 18Km로 서울의 북악산, 인왕산, 남산, 낙산의 능선을 잇고 있는데 그 모양은 타원형에 가깝다. 이 성곽에는 각각 동쪽과 서쪽에 흥인지문과 돈의문, 남쪽과 북쪽에 숭례문과 숙정문의 사대문을 냈으며, 북동쪽과 남동쪽에 혜화문과 광희문, 북서쪽과 남서쪽에 창의문과 소의문의 사소문을 냈다. 서울 성곽은 일제의 침략이 시작되면서 도시 계획의 명목 아래 허물어지기 시작하였고, 해방과 한국전쟁 혼란기에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이에 서울시는 1975년부터 종합적인 서울 성곽 복원사업을 시작하였다. 서울 성곽은 우리 선조들이 외적의 침략으로부터 서울을 방어하기 위하여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쌓은 귀중한 문화유산이므로 길이 보존해야 할 유적이다. |
ㅇ 촬영일자 : 2010. 11. 14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서울과학고 부근
최규식 경무관, 정종수 경사 최규식 경무관은 1931년 9월 9일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 1961년 경찰에 투신하여, 1967년 10월부터 종로경찰서장으로 재직하였다. 서장 재직 중이던 1968년 1월 21일 북한 무장 공비 김신조 등 31명이 청와대를 기습 공격하기 위해 파주 지역에서 남하 중이란 첩보를 접수하고, 이를 막기 위해 경찰관들을 현장에 배치하고 지휘하였다. 무장공비 일행이 청와대 바로 옆(현재 청운실버센터 앞)에 이르렀을 때 최규식 서장이 그들을 검문하여 막아섰고, 검문을 통과할 수 없었던 공비들이 외투 속에 감추고 있던 기관단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투척하면서 격렬한 총격전이 전개되었다. 당시 최규식 서장은 가슴과 복부에 관통상을 입고서도 “청와대를 사수하라”는 마지막 명령을 내리면서 현장에서 순직하였고, 이러한 헌신과 희생으로 공비들의 청와대 쪽 진행을 완전히 저지할 수 있었다. 그는 특정 지역을 관할하는 치안 책임자로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투철한 사명감으로 임무를 완수하였고, 이에 정부는 경무관으로 추서하고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정종수 경사는 1935년 7월 17일 경상북도 상주 출생으로 1960년 경찰에 투신하여 종로경찰서 재직 중이던 1968년 1․21사태시 최규식 경무관과 함께 무장공비와 교전 중 순직하였다. 이에 정부는 경사로 추서하고 화랑무공훈장을 수여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무장공비의 침투를 몸을 던져 저지한 곳에 표석을 마련하고, 청와대로 가는 길이 바라보이는 이곳 자하문고개에는 동상과 추모비를 세워 드높은 애국충절을 기리고 있다. |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자하문고개
서울 백악산 일원 지정번호 : 명승 제67호 / 시대 : 조선시대 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운동 산 2-27번지 등 164필지 백악산은 조선시대에 한양을 도읍으로 정할 때 주산(主山)으로 삼았던 산인데 현재는 북악산으로 불린다. 조선 건국 후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기 위해 도시를 새로 구성하였는데, 우뚝 솟은 백악산을 북쪽의 주산으로 삼아 배경이 되게 하였고, 지금의 남산인 목멱산을 안산(案山)으로 두어 남쪽 경계로 삼았다. 동쪽의 낙산이 좌청룡, 서쪽의 인왕산이 우백호가 되도록 하였다. 그리고 주산인 백악산 아래에 경복궁을 짓고 이를 기준으로 하여 한양 도성 계획을 세웠다. 곧 백악산은 풍수지리에 따라 한양의 도성을 계획할 때 중심이 되었다. 문화재 명칭을 백악산으로 한 것은 조선시대 도성 축성의 의미를 되살리고, 조선시대의 각종 사료에 나타나는 “백악(白岳)”의 지명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서울성곽(사적 제10호)과 서울 부암동 백석동천(명승 제36호) 등이 있는 백악산 일원은 역사적, 문화적 가치가 있으며 자연경관이 수려한 곳이다.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창의문안내소 부근
치(雉) 성곽 중 일부분을 돌출시켜 성벽에 기어오르는 적을 쏘거나 공격하기 위한 방어시설
여장(女墻) 성곽 위의 담장을 여장 또는 성가퀴라고 부른다. 이군의 몸을 가리면서 적을 총이나 화포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로 총격전이 잦아지면서 많이 축조되었다. 1개 여장을 1타(垜)라 부르며 1타에는 3개의 총 쏘는 구멍이 있다. 가까운 곳을 쏘는 근총안(近銃眼) 1개가 한가운데에 있고, 양옆에는 먼 데를 쏘는 원총안(遠銃眼) 2개가 설치되어 있다. 원총안은 대개 구멍을 수평으로 뚫은 반면 근총안은 비스듬히 아래쪽을 향하고 있다.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곡장
서울성곽길 안내 서울의 내사산(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고 4대문(숙정문, 흥인지문, 숭례문, 돈의문 터)과 4소문(혜화문, 광희문, 소의문 터, 창의문)을 지나는 21Km 성곽길은 성곽을 따라 걸으며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체험하는 역사, 문화 탐방로입니다. 이곳 창의문(彰義門)은 4소문 중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의 소문으로 이곳 계곡의 이름을 빌려 자하문(紫霞門)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렸습니다.
창의문 개방시간 안내 ○ 하절기(4월~10월) : 09:00 ~ 15:00까지 입장 가능 ○ 동절기(11월~3월) : 10:00 ~ 15:00까지 입장 가능 ※ 퇴장시간은 오후 5시까지 ○ 휴관일 :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화요일 휴관) ○ 탐방시간 : 2시간 내외 소요 ○ 탐방인원 : 제한 없음 ○ 입장료 : 무료 ※ 탐방객은 출입시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문화유산해설 안내 : 10시, 14시(2회) |
ㅇ 촬영일자 : 2012. 04. 29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창의문안내소 부근
청계천 발원지(發源地) 이곳에서 북동쪽 북악산 정상 쪽으로 약 150m 지점에 항상 물이 흘러나오고 있는 약수터가 있으므로 이를 청계천 발원지(發源地)로 정하였다. |
ㅇ 촬영일자 : 2012. 05. 13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자하문고개
성벽에 새겨진 글자들 서울성곽의 성벽 돌 중에는 글자가 새겨져 있는 돌들이 있다. 이는 대개 성벽 축조 당시 천자문 글자에서 따온 공사 구역 표시, 공사 담당 군현(의령, 흥해 등), 그리고 공사 일자와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등이다. 서울성곽은 태조 5년(1396) 처음 쌓을 때부터 전체 59,500자(약 18.2Km)를 600자(약 180cm) 단위로 나누어 총 97구간으로 구획하고 천자문(千字文) 순으로 표시하였다. 북악산 정상에서 천지현황(天地玄黃)의 천(天) 자에서 시작한 구획 표시는 낙산, 남산, 인왕산을 거쳐 조민벌죄(弔民伐罪 : 불쌍한 백성을 돕고 죄지은 자를 벌하다)의 조(弔)자에서 끝난다. 성벽 곳곳에는 진자총면(振字終面 : 진 자 구역 끝 지점), 강자육백척(崗字六百尺 : 강자 구역 600자) 등 각 구역을 표시한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조선 팔도 각 지역에서 인원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도(道) 또는 현(縣)의 담당 지역을 표시하여 의령시면(의령시면 : 경상남도 의령 시작 지점), 흥해시면(흥해시면 : 경북 영일군 흥해 시작 지점) 등의 글씨가 성벽 돌에 새겨져 있다. 이러한 공사 실명제는 이후에도 계속되어 후대에는 아예 감독관의 직책과 이름 및 날짜가 기록된 것도 있다. 가경 9년(1804) 갑자 10월일 패장 오재민, 감관 이동한, 변수(기술자, 편수) 용성휘 등을 기록한 글씨도 보인다. |
ㅇ 촬영일자 : 2012. 05. 13
ㅇ 촬영일소 : 북악산 청운대 부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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