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지 안내문

북한산(서울/경기) - 안내문

mouner(마우너) 2012. 8. 23. 00:37

 

 

북한산성(北漢山城)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 북한리

 

이 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서로 치열한 공방전을 벌리면서 뺏고 빼앗기던 쟁탈 대상지로 백제시대에 쌓은 토축산성이었다.

고려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 격전이 있었고,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재궁(관)을 옮겨 온 일도 있었다. 조선시대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하여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석성으로 완성하였다.

조선 영조 21년(1745) 승 성능이 지은 ‘북한지’라는 문헌에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 전해지고 있다. 당시의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행궁, 군창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12개 사찰, 99개소의 우물, 26개소의 저수지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2백여만평으로 옛 한성의 방어 역할을 했던 이 산성은 1990년부터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을 일부 보수, 복원하였다. 

ㅇ 촬영일자 : 2004. 07. 27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대남문 부근

 

 

이곳에 세워졌던 新羅眞興王 巡狩碑(國寶 제3호)는 14○○餘年의 오랜 風雨로 그 碑身保存이 어려워 이를 安全하게 保存管理하기 위하여 1972년 8월 16일 國立博物館으로 移轉하고 遺址를 史蹟으로 指定하다.

1972년 8월 16일

대한민국

ㅇ 촬영일자 : 2004. 07. 27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비봉

 

 

북한산성 청수동 암문(北漢山城 靑水洞 暗門)

사적 제162호

소재지 :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북한동

암문(暗門)은 성곽(城郭)에서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적이 알지 못하게 만든 비상(非常) 출입구(出入口)로, 북한산성에는 청수동 암문을 비롯하여 서암문(西暗門), 동암문(東暗門), 백운동(白雲洞) 암문(暗門), 용암(龍岩) 암문(暗門), 부왕동(扶旺洞) 암문(暗門), 가사당(袈裟堂) 암문(暗門) 등이 있다.

북한산성은 삼국시대(三國時代)부터 격전지(激戰地)로 조선시대(朝鮮時代)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외침(外侵)을 당하여 한양(漢陽) 도성(都城)을 수비(守備), 방어(防禦)하고자 숙종(肅宗) 37년(1711)에 석성(石城)으로 수축(修築)되었다. 승려(僧侶)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북한산성의 축조과정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1990년부터는 훼손된 대남문(大南門), 대성문(大城門), 대동문(大東門), 보국문(輔國門), 용암(龍岩) 암문(暗門), 청수동(靑水洞) 암문(暗門) 및 성벽(城壁) 등을 보수(補修)하고 동장대(東將臺)를 복원하였다. 

ㅇ 촬영일자 : 2003. 03. 26

ㅇ 촬영일자 : 2004. 07. 27

ㅇ 촬영일자 : 2008. 12. 13

ㅇ 촬영장소 : 북한산 청수동암문

 

 

북한산성

지정번호 : 사적 제162호

시대 : 조선 숙종 37년(1711)

소재지 : 서울특별시 은평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 일원

이 성은 원래 백제가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였을 때 도성을 지키기 위하여 쌓았던 성이다. <삼국사기>에는 백제 개루왕 5년(132)에 이 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11세기 초 거란이 침입했을 때에는 이곳에 고려 태조의 관(棺)을 옮겨 온 일도 있었으며, 고려 고종 19년(1232)에는 몽고군과의 격전이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외침을 당한 뒤 도성 외곽의 축성론이 일어나 숙종 37년(1711)에 왕명으로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하여 7,620보의 석성이 만들어졌다. 영조 21년(1745)에 스님 성능(聖能)이 지은 <북한지(北漢誌)>에는 이 성의 축조 과정이 기록되어 있다. 당시 성의 길이는 21리 60보이며, 시설로는 14개의 성문과 동장대, 남장대, 북장대와 행궁, 군창(軍倉)이 있었으며, 성내에는 승군이 주둔했던 중흥사 등 사찰 12개, 우물 99개소, 저수지 26개소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성의 둘레는 12.7Km이며 성안의 면적은 6,611,600㎡로 훼손된 대남문, 대성문, 대동문, 보국문과 성곽들은 일부 보수, 복원되었다. 

ㅇ 촬영일자 : 2003. 03. 26

ㅇ 촬영일자 : 2004. 07. 27

ㅇ 촬영일자 : 2008. 12. 13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보국문 앞

 

 

자연휴식년제 지역 출입금지 안내

ㅇ 폐쇄지역 : 아래 법정 탐방로를 제외한 우측 지도에 표시된 전 지역(붉은색 사선)

- 구기매표소~대남문~대성문

- 평창매표소~일선사~대성문

- 형제매표소~일선사~대성문

ㅇ 폐쇄기간 및 연장(1기 3년, 2기 3년)

1기 - 2000년 1월 1일~2002년 12월 31일

2기 - 2003년 1월 1일~2005년 12월 31일

ㅇ 폐쇄 및 연장 사유 : 자연생태계 보호 및 훼손된 자연자원의 복원

ㅇ 무단출입 등 위반시

자연공원법 제29조 제1항 및 동법 제86조에 의거 50만원의 과태료 처분을 받게 됩니다. 

ㅇ 촬영일자 : 2003. 03. 26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비봉매표소

 

 

관음기도성지 목정굴(木精窟)

金仙寺는 麗末鮮初의 高僧 自超 無學스님(1327~1405)의 創建으로 전해지고 있다. 1791년정조의 命으로 重創되어 비로소 오늘의 祈禱명찰이 되었다.

여기에는 목정굴이라는 관음기도 성지와 聾山(농산)스님 그리고 정조대왕사이에 얽힌 순조의 誕生秘話가 서려 있다.

정조는 슬하에 세자가 없어 고심하던 중 한수북녘에 계행을 엄히 지키며 수십년간 산문출입을 금하고 있던 농산이란 고승이 주석 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마침내 그에게 世子誕降을 위한 祈禱를 명하게 되었다. 농산은 바로 이곳 목정굴에서 100일간 관음기도를 올린 것이다.

이때 왕실에서 발신을 알 수 없는 봉서 하나가 올라왔는데 “庚戊 6月 18日 世子誕降”이라 적고 있었다. 과연 순조는 바로 이날 태어났다.

이날 서북쪽으로부터 말고 붉은 서기가 왕실에 닿아 産室을 휘감고 있었다. 사람을 놓아 그 진원을 추적하게 하니 그곳은 다름아닌 바로 이곳 목정굴이었다. 굴안에는 坐脫入亡한 체로 앉아 있는 농산스님의 脫穀身 뿐이었으나 서기는 여전히 그의 정수리로부터 産室로 흘러들고 있었다.

농산스님의 입적과 순조로의 환생을 목도한 정조는 內需司에 命하여 목정굴 위에 절을 크게 중창하게 하였으니 곧 금선사이다.

그후 일제의 강점으로 금선사는 廢寺가 되었으나 光復후 道空스님이 중건하였고, 현 주지 法眼스님이 목정굴을 복원(1996년 3월)하여 수월관음보살을 봉안하고 전통사찰로 등록한 것이 오늘의 금선사와 목정굴이다.

지금도 금선사에서는 순조의 誕辰祭를 모시고 있다.

불기 2544(2000)년 8월 일

대한불교조계종 金仙寺 

ㅇ 촬영일자 : 2003. 03. 26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목정굴 입구

 

 

안내문

국립지리원에서는 측량법령에 따라 우리나라 모든 측량의 기준이 되는 국가기준점인 삼각점을 설치하여 공공 및 민간분야에서 이용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삼각점은 전국에 일정한 간격으로 16,000여점이 설치되어 지도 제작, 지적 측량, 건설 공사, 각종 시설물의 설치 및 유지관리 등을 위한 기준점으로 이용되는 국가 중요시설물로써 국민 모두의 소중한 재산입니다.

이러한 삼각점은 누구든지 파손하거나 그 효용을 해하는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되며 만약 무단으로 훼손하는 경우에는 이 지역의 모든 측량을 실시할 수 없으며 관련자는 측량법령에 따라 벌을 받게 되오니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곳에 설치된 삼각점(서울 22)의 위치는 표주의 십자선 중심을 기준으로 아래와 같습니다.

ㅇ 동경 : 126° 58′ 23″

ㅇ 북위 : 37° 37′ 51″

ㅇ 높이 : 약 715m

2002. 8.

건설교통부 국립지리원장

전화 : 031) 210-2651~2 

ㅇ 촬영일자 : 2003. 03. 26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대남문 부근

 

 

연혁

삼각산 문수사는 북한산 정상 해발 645m에 자리하고 있는 국내 삼대 문수성지이다. 고려 예종 4년(1109)에 구산선문중 굴산파의 중흥조 태감타연국사(1070~1159)가 개산하였다. 탄연국사는 당대의 대선지식이요, 문장가요, 고려 제일의 명필가로서 그 분이 쓴 비가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고려 불교의 중흥조이며 한국 불교의 종주인 태고 보우국사께서도 잠시 이곳에 주식하였고, 수많은 선객들의 선방이 되기도 하였다. 고려 의종이 친히 등정하였고(고려사) 조선조 문종도 이곳에 내왕하였으며, 문종의 따님인 연창공주는 이곳에 상주하면서 문수사를 중창하여 한때는 왕가의 원찰이기도 하였다.

조선조 박문수어사도 그 부친이 이곳 문수도장에서 기도로 얻어진 분이며, 이승만 전대통령도 그 자당이 황해도 평산에서 이곳 삼각산 문수사까지 와서 기도를 드려 얻어진 인물이다.

이박사는 4.19 직전 이 인연으로 대통령 재직시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친히 등정하여 “문수사”의 사액을 남기고 사내대중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어 현재 보존되어 있다.

6.25때 요사가 소진된 것을 고 박충식 국회의원이 중창하였고, 그후 서신수 스님이 보수하였다.

1988년에 국가 전통사찰로 지정되었고, 1985년에 허혜정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오백나한전과 삼성각 등 일대 개축불사를 하였고, 천연동굴을 굴법당으로 조성하여 기도와 참배를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옆으로 오사법당 신축불사를 하여 국내 제일의 산정문수가람으로 조성할 계획이다.

1996년 7월

대한불교 조계종 삼각산 문수사 주지백 

ㅇ 촬영일자 : 2010. 12. 11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문수사

 

 

대한불교 조계종 삼각산 문수사 연혁

서울의 진산인 삼각산 정상에 자리한 문수사는 고려 예종 4년(1109)에 대감타연국사께서 개산하였고 국사께서는 주위의 절묘한 기암괴석과 경관 천연동굴에 매료되어 이곳을 불법의 유연찰토로 정하고 불우를 지어 문수암이라 하고 천연동굴을 문수굴이라 명명하였습니다.

국사께서는 참선과 교학을 두루하여 국사로 책봉되었을 뿐 아니라 고려조 제일가는 명필가로써 그의 필적은 청평 문수원기와 예천 북룡사비, 북한산 승가굴중수비, 청도 운문사원응국사비가 오늘날까지 전합니다. 고려 불교 중흥조인 태고보우국사께서도 이 동굴에서 정진삼매중 청의동자로부터 차 한잔 얻어 마시고 활연대오하였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으며 그후로부터 수많은 고승석덕의 주석처가 되었으며 신령한 영험도량으로 널리 알려져 오대산 상원사, 고성 문수사와 함께 우리나라 문수보살 3대 성지로 널리 알려져 국내 제일의 기도도량이 되었습니다. 고려 의종 21년(1167)에 왕이 친히 등정하였고 조선조 문종 원년(1451)에 문종의 따님이신 연창공주가 중창하여 한때는 왕가의 원찰이 되기도 하였습니다(고려사 왕조실록)

조선조 암행어사 박문수도 그의 부친이 오랫동안 후사가 없어서 이곳에서 기도로 얻어진 인물이며 이승만 전대통령도 그의 자당께서 이곳에서 기도로 얻어진 인물입니다. 이 인연으로 4.19 직전 82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친히 등정하여 문수사의 사액을 남기고 사내대중과 함께 기념사진도 찍어 현재 보존되어 있습니다. 1921년에 삼성각을 중창하고 오백나한전을 개축하였으며, 이후 6.25 동란으로 소진되었던 것을 당시 서신수스님의 발원으로 고 박충식국회의원이 개축하였습니다. 1983년 5월에 허혜정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여 대웅전, 삼성각, 나한전을 재 개축하고 약 40평으로 된 천연동굴을 굴법당으로 장엄하여 사찰을 찾는 모든 불자들에게 환희심을 갖고 기도와 참배를 할 수 있도록 조성하였습니다. 

ㅇ 촬영일자 : 2010. 12. 11

ㅇ 촬영장소 : 북한산 문수사입구

대동단 본부터(大同團 本部址)

이 곳(구기동 168)은 비밀항일결사 대동단이 자리하여 의친왕 이강공을 상해 임정으로 모셔 가려는 등 독립정책을 폈던 곳 

ㅇ 촬영일자 : 2010. 12. 11

ㅇ 촬영장소 : 북한산 구기동 입구